픽사의 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어쩌다보니 기회가 안 닿아서 벅스 라이프와 몬스터 주식회사는 아직 안 봤지만, '니모를 찾아서'는 정말 좋았고, '인크레더블'도 정말 깔깔대면서 봤다. 하지만 '카'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려야 했다. 스토리가 너무 뻔한 것은 아닐까. 자동차들이 세트로 나오다니, 부모들 지갑을 넘봐도 너무 속보이게 넘보는 건 아닐까. 캐릭터가 저렇게 많으면 2시간 남짓한 영화에서 너무 산만해지지 않을까 등등등.
* 그런 걱정들은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픽사는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가야 하는지 정말 잘 알고 있었고, 캐릭터들이 세트로 몰려나오지만, 주인공은 주인공의 느낌을 충실히, 조연들은 극의 양념 역할을 정말 잘하더라. 와아.
* 다소 상투적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영화의 내용도 참 좋았다. 예전에 태백 지역에서 야외조사를 했던 경험 때문일까? 예를 들어 영동고속도로는 높다란 기둥을 세워 수많은 골짜기들을 하늘에서 가로지른다. 덕분에 서울에서 동해안까지 걸리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서 굉장히 짧아졌지만, 쭉 뻗은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다보면 주변의 풍경은 그저 스쳐지나가게만 된다. 서울에서 출발해 동해안에 도착하더라도 느낀 것이라고는 '와, 산 많다. 길 똑바르네. 터널도 굉장히 많구나.'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위해 고속도로 아래에서 지형을 따라 굽이친 국도를 이용하게 되었을 때는 비록 시간은 좀 더 걸릴 지 몰라도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산줄기가 멋드러지게 흘러내린 바로 옆 쪽에는 저마다 다르게 생긴 골짜기에서 시원한 냇물이 있었고, 고속도로를 통해 달릴 때는 그저 '휴게소'에 들렀을 뿐이지만,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에 숨어있던 맛집이 있었다.
굽이굽이친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 산머리에 도달했을 때, 그동안 시야를 가려왔던 산이 갑자기 사라지고, 절벽 아래로 탁 트인 들판이 보이고, 저멀리 산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들을 보면서, 나도 아마 '카'의 맥퀸처럼 '와우-'하는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카'는 그런 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화이다.
* '레이스'는 요즘 사람들의 '삶'에 대한 참 흥미로운 비유이다. 관중들의 시선을 받으며 1등한 사람에게는 화려한 영광이 주어지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잘 닦여진 트랙을 쳇바퀴 돌듯이 빨리 도는 것일 뿐이다. 언뜻 보기에는 공정한 규칙이 있는 경쟁같지만, 실제 트랙 위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앞지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며 반칙도 불사한다. 트랙은 운동장이라기보다는 전쟁터에 가까우며, 그 와중에 튕겨나가는 사람은 그저 운이 나쁜 것이거나 실력이 부족할 뿐이다. 관중들은 튕겨져 나간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2등과 3등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1등만이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그 1등이라는 게, 결국은 수 백 바퀴의 쳇바퀴를 남들보다 빨리 돌았다는 것 외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감독 생각에 인생은 정해진 트랙을 누가 더 빨리 도느냐로 판가름하는 레이스가 아니다. 예고편에서 나왔듯이 '인생은 여행이고(Life's a journey) 여행을 즐겨라(Enjoy the trip)'라는 것이다. 그런 철학을 지녔음에도 그 누구보다 멋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을 보면 샘도 난다. 쳇. 하긴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이런 영화도 나오지 못했겠지만.
* 캐릭터도 굉장히 그럴싸하다. 특히 자동차를 캐릭터로 만들 때 보통 헤드라이트를 눈으로 표시하기 쉬운데, '카'에서는 유리창을 눈으로 표시했고, 덕분에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울고 웃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거의 최초로 물고기를 캐릭터로 만들때 눈썹이 아니라 눈두덩이의 근육만으로 표시했던 픽사답다(그 때 픽사에서도 관습에 따라 물고기에 눈썹을 만들었으나, 고증을 맡은 해양학 교수가 물고기는 눈썹이 없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갔다고 한다.). 니모 이후에 나온 물고기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들이 모두 니모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듯이, 앞으로 나오는 자동차 주인공의 애니메이션 또한 '카'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설정 뿐만 아니라, 그 수많은 캐릭터들을 양념으로 버무려놓은 것도 재미있다. 특히 캐릭터들마다 목소리 연기가 참 좋았는데, 예를 들어 타이어 가게의 주인은 영어를 잘 구사하지만 억양과 발음에서 이탈리아 느낌이 많이 났으며 (귀도야 말할 것도 없이 이탈리안 소년이지만...맞나?), 튜닝 가게 아저씨는 흑인 영어였다. 퇴역 군인 캐릭터는 대사마다 군인같은 딱딱 끊어지는 느낌을 들려줬고 등등등. 영어를 좀 더 잘 하면 그런 목소리 연기까지 잘 음미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는 단순히 대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다. 한정된 시간 내에 복잡한 설정을 보여줄 수 없다면, 이렇게 '전형적인 인간상'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 연기만으로도 해당 캐릭터를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도 너무 스타 캐스팅에 집중하지 말고, 다양한 목소리 연기들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 예고편이나 포스터 등에서 캐릭터가 너무 많은 것을 보며 '저 캐릭터들에게 대사 하나씩만 줘도 극이 참 산만해지겠구나.'싶었는데 웬걸. 전형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면서 캐릭터를 보기만 해도 웃을 수 있게 만들어놨다. 특히 퇴역 군인+히피 조합이 티격태격거릴 때마다 어찌나 웃기던지. 특히 히피 캐릭터가 유기농 연료에 대해 음모론을 설파할 때는 정말 깔깔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최고 대박은 젖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 기술에 있어서도 픽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일본의 CG는 파이널 판타지 쪽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떻게 보면 '극사실주의' 쪽으로 발전하고 있는 반면에,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살릴 건 살리고, 생략할 건 생략하면서 특징을 잘 잡아내었기에 보는 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극사실주의 CG의 경우 영화 특수 효과 등에서 중요하게 쓰여야겠지만, 3D 애니메이션의 경우 오히려 이런 표현 기법이 더 맞는 듯 하다.
* 픽사의 사람들은 참 유쾌한 모양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숨은 그림찾기처럼 곳곳에 재미있는 장면들이 넘쳐난다. 이를테면, 초반에 맥퀸이 점프를 하고, 공중에서 타이어를 젖혀가며 에어워킹을 하고, 거기에 혀까지 내민 모습은 영락없이 마이클 조던의 그것이었다(기사를 찾아보니, 애니메이터들은 맥퀸이 방향전환하고 꺾고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로 마이클 조던 같은 운동선수나 파도타기 선수들을 연구했다고 한다. 레이스에서 맥퀸이 파도타기 선수처럼 보이기를 원했다나.). 아주 잠깐 스쳐가는 장면이었지만, 맥퀸의 실종을 보고하는 뉴스에서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라는 자막이 뜨면서 '맥퀸을 반드시 찾을 것입니다'라고 으스대는 험머를 볼 수 있는데, 그는 아마도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인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일 것이다. 흐흐. 하긴 터미네이터께서 험머 정도는 되야지. :) 그 외에도 제초기계의 공포라던가, 자동차를 닮은 파리들이 유리창에 두줄 바퀴자국을 남긴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많다. 이것도 나중에 DVD로 사서 계속 깔깔거려야겠다. :)
* 아으. 추가할 것이 계속 생기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영화의 주무대로 쓰인 Route 66은 1926년에 만들어진 도로로서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해서, 세인트 루이스, 미주리, 캔사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아리조나 주를 거쳐, 캘리포니아의 LA까지 이르는 총연장 3,939km의 도로이다. 서부로 향하는 주도로였고, 도로가 지나가는 주변의 지역 경제를 먹여 살렸으며, 이후 미국의 새로운 고속도로 제도인 Interstate Highway System이 들어서면서 도로가 쇠락해질 위기에 처해지자, 지역 주민들이 그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도 보였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50년대 들어 도입된 Interdstate Highway System은 기존의 지형을 따라 흐르던 Route66과는 달리 기술이 발달한만큼 각 도시들을 잇는 최단 거리를 계산, 그에 따라 도로를 놓기 시작했다. 결국 1985년 Route 66은 사용중지(즉, 더이상 국가 관리체제 하에 있지 않게)되었다. Route 66 중 일리노이, 뉴멕시코, 아리조나 주를 지나는 일부는 'Historic Route 66 (역사적 66번 도로)'라는 이름으로 관광 도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의 위 페이지만 쳐다봐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특히 66번 도로와 대중 문화의 관계가 재미있다.) 영화 '카'와 관련있는 것만 뽑아보면, 카는 원래 'Route 66'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으나, 60년대에 동명의 고전 TV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Cars'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키'에 나오는 가상의 마을 래디에이터 스프링스는, 아마도 캘리포니아의 암보이(Amboy)라는 마을을 모델로 했을 거라고 한다.
.... 그나저나 위키피디아 진짜 잘 되어 있고나.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영화 Cars 관련 페이지를 보시라.
혹시나 해서 사진 공유 사이트 Flickr도 가봤는데, 역시나... 굉장히 많은 사진들이 있었다. 'Route 66', 'California' 정도를 검색어로 넣으면 좋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맨 위에 사진 하나도 그 쪽에서 검색해서 가져왔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자동차 주의 경고판으로 패러디되었지만, 캘리포니아에는 인디언 천막같은 느낌의 모텔( http://www.flickr.com/photos/76206840@N00/53709615/ )도 있다. (이 모텔의 광고 문구는 Do it in a tee pee - 천막 안에서 하세요.;;;)
어떤 사람은 영화 카를 보고(미국에서는 좀 더 일찍 개봉했으니) 감명을 받고 Route 66을 따라 자동차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사진들은 http://www.flickr.com/photos/stanbower/ ··· 13668%2F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전경에 Route 66을 넣고 원경에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대비한 사진도 참 좋더라.)
* 뭔가 더 쓰고 싶기도 하지만, 한 주를 시작해야 하니 이쯤에서 자야겠다. :)
ps : 참, 언제나처럼 픽사는 영화 시작 전에 단편 애니메이션을 하나 보여주는데, 이번에 같이 보여준 '원맨밴드'도 짧지만 강했고, 재치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