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폴라리스 랩소디

Posted 2006/12/17 00:13, Filed under: Aladdin
폴라리스 랩소디 1
이영도 지음/황금가지

잡을 때마다 후닥닥 읽어버렸기 때문에, 네 번째로 읽는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읽으려 했지만, 또 밤을 지새우며 허겁지겁 읽어치울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때부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를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별로 생각않고 '이영도'라는 세 글자를 적어넣게 되었다. 비록 내가 읽은 가장 최근작인 '피를 마시는 새'는 전편에 비해 덜 만족스러웠지만, 데뷔작이라 할 드래곤 라자에서 큰 호평을 받은 눈물을 마시는 새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영도 씨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라고 물어본다면 약간 고민하긴 하겠지만, 나는 '폴라리스 랩소디'를 꼽는다. 가장 훌륭한 것을 꼽으라면 '눈물을 마시는 새'(이하 눈마새)를 선택하겠지만, 어떤 것이 더 좋냐고 한다면 눈마새보다는 어딘지 힘이 덜 들어간 듯한 '폴라리스 랩소디'를 사랑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폴라리스 랩소디'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전작들처럼 엘프와 드워프가 나오는 톨킨형 판타지는 아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있고 용이 날아다니고 악마가 있고 신화가 있고 전설이 있는 그런 판타지인 것은 맞다.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해적단이다 보니 해양 액션 활극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쇠약해진 제국 내에서 제후국들의 전쟁, 그리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으니 중세 전쟁물 혹은 역사물 혹은 정치물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무엇이라 분류하든 간에 '폴라리스 랩소디'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이다.

먼저 가장 재미를 주는 것은 정말 개성 뚜렷한 인물들이다. 대사도 어느 정도 있고, 극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인물이 대략 40여명 정도 되려나? 해적단의 여덞 선장을 비롯해 그의 반대쪽에 서있는 인물들까지 다들 개성이 뚜렷하고 이를 비교해보는 맛도 있다. 거기에 이 인물들이 서로 지지고 볶고 만담을 펼치는데(라이온-서 슈마허, 데스필드-파킨슨 신부), 이것이 이영도 씨 글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정말 재미있는 것이 바로 원정대 혹은 추적대의 여정이다. 비유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추락 장면이나, 오우삼 영화의 비둘기 날아다니는 장면(이건 좀 낙관같은 맛이 있지만)처럼 원정대/추적대는 이영도 씨 소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시시각각 변하는 배경들과 함께 쫓고 쫓기는 사람들은 많은 얘기를 만들어낸다. 아마 이 때문에 이영도 씨의 다른 작품에 비해 폴라리스 랩소디를 더 좋아하는 것일 것이다. 폴라리스 랩소디는 말 그대로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쫓기고 쫓는 도피/추적행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니까 말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소설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작가 자신이 연재후기에서 '밀리물을 두드리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라고 토로할 정도로 전쟁 묘사가 뛰어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전작인 퓨처 워커에서 대규모 전투 장면이 나옴에도 묘사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서였는지, 아니면 이 무렵(2000년 연재였으니 99년 언저리에 썼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에 전국을 휩쓸어버린 스타크래프트 때문이었는지-벌쳐, 데스필드, 드라군 등 곳곳에 스타크래프트의 흔적도 보인다-는 모르겠지만,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는 정말 작정하고 전장을 그리고 있다. 바다에서는 전함들이 함포전을 하다가도 뱃머리를 맞대고 육박전을 펼치기도 하고, 육지에서는 온갖 지형에서 보병, 기병, 포병들이 부대 단위로 회전을 벌여서 설명을 따라 그림을 그려 가며 읽을 정도이다. 거기에 소설 막판으로 가면 온갖 초인적인 마법 유닛(;;)들이 가미되면서 재미를 더한다.

여기에 이영도 씨가 하고 싶은 말들이 주제로서 얹히게 되는데,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는 자유와 복수, 인간이 서로 상호 영향을 끼치는 것과 끼치지 않는 것에 대한 독특한 생각들이 드러나고 있다. 신앙에 관한 얘기들이라던가 하는 부분들은 말이 좀 많은 느낌도 들지만, 드래곤 라자나 피를 마시는 새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간결하게 갈무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연재 당시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저 재미있다라는 생각만 들었었는데, 몇 해가 지나고 그의 후속작들도 읽어본 뒤에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전작들과 이 작품의 관계, 그리고 이 작품과 후속작들의 관계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폴라리스 랩소디의 출발은 아마도 전작 퓨처 워커의 신차이 선장이었을 것 같다. 퓨처 워커에서 바다 사나이 얘기를 그리면서 '이걸 아예 메인으로 잡고 써봐도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건 아닌지. 드래곤 라자/퓨처 워커에서 다소 비판받았기 때문인지 폴라리스 랩소디의 세상에서는 '마법'을 조금 다르게 다룬다. 물론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부리지만, 전작들이 다소 전형적인 RPG 느낌이 났다고 하면, 여기에서는 그냥 자연스런 기술의 느낌이랄까?

후속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더 흥미롭다. 사람들이 서양의 것을 빌려 쓰는 판타지가 아닌 한국형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작가는 연재후기를 통해 "딱 한 가지만 물어보지요. 배경도 중국이고 주인공도 중국인인 구운몽은 중국적 소설입니까?"라고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울컥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 때가 '한국형 판타지 : 눈물을 마시는 새'의 시초가 된 것 같다. 이영도 씨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것들, 그래 내가 아주 진짜 한국적인 걸 써주마!"라고 불타 오르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달까.

여러 작품을 만들다보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것 같은데 각 작품간의 인물들도 다소 연결되는 느낌이다. 멀쩡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불안정한 모습들의 키드레이번-케이건-엘시 에더리가 그렇고, 전지성에 고뇌하는 벨로린-륜 페이가 그렇고, 애교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잘 생각해보면 꽤 섬뜩한 면도 갖고 있는 율리아나-카린돌이 그렇다.

전쟁 중에 목도리 도마뱀이 나오는데, 목도리 도마뱀은 파충류이다 보니 날씨에 구애받게 되었고, 그래서 폴라리스 랩소디의 전쟁에는 날씨도 큰 변수가 되었다. 이것이 이후 눈마새에서 변온인간 종족 나가와 그의 전쟁이라는 식으로 진화된 게 아닌가 싶다. 나가의 소드락 복용을 지금껏 스타크래프트의 스팀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폴라리스 랩소디의 '초반에 폭발적인 군사단위'인 노예병과 통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

이래 저래 내가 현재로서 가장 좋아하는 이영도 씨의 소설인데, 앞으로 더 재미있는 것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ps : 출판본에는 '대륙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필요했던 지도인가!
2006/12/17 00:13 2006/12/17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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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_-; 2006/12/19 18:13 Delete Reply

    싱잉플로라의 이미지가 대략... -_-; ㅋㅋㅋ

    1. Re: # HaraWish 2006/12/25 20:59 Delete

      아, 그 만화... 건들건들대는 꽃의 이미지가 일품이었는데, 주소를 잊어버렸다;

  2. # 바루 2006/12/22 13:38 Delete Reply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하루 꼬박 이것만 읽고서 느낀 건 정말 허무하다였거든요.

    1. Re: # HaraWish 2006/12/25 21:00 Delete

      헉. 하루에 읽기에는 양이 꽤 많았을텐데요. 저는 연재 때 '아, 다음 회에는 어떻게 될까?'라며 감질나게 읽어서인지, 언제 다시 잡아도 조금씩 조금씩 읽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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