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반지
콘라트 로렌츠 지음, 김천혜 옮김/사이언스북스


어느 날, 산호 어항에 대한 흥미(그러니까 수초와 다른 어항들이 균형을 이루어 조건만 맞춰주면 그대로 유지되는 작은 생태계에 대한 흥미)를 보이자, 한 선배가 이 책에 보면 로렌츠가 시내물에서 물을 떠와서 생태계가 균형을 맞추는 것을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꽤 재미있게 읽었고, 감상을 말하자면...

음.. 이 책은 '콘라드 로렌츠의 수필집'이다. 이상!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으로 끝내면 욕먹겠죠? -_-?

저 간단한 말이 이 책에 대한 모든 걸 얘기해주지만, 늘 하던 것처럼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해보죠 뭐.

From Campbell, Biology,  2nd ed, Benjamin/Commings publishing company. 1146p
먼저 콘라드 로렌츠가 누구인지 알면 될 것 같네요. 콘라드 로렌츠, 콘라드 로렌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하면 '각인'이라는 말과 '기러기'라는 말을 힌트로 드리죠. 아직도 아리송하다면, 오른쪽의 그림을 보시면 됩니다.

어디에서 많이 본 그림 아니던가요? 먹이통을 들고 걸어가는, 후덕한 뒷모습의 할아버지와 그를 열심히 따라가는 새끼 기러기들. 그렇습니다. 이건 과학 교과서에서 본 그림입니다. (교과과정 개편 후로는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

기러기들은 부화할때 처음 본 동물을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따라다닙니다. 부화할때만 어미 기러기에서 떼어놓고 알에서 깨어날 때 사람이랑 만나고 나면 나중에 자신의 실제 어미인 어미 기러기를 봐도 무심해하고 처음 본 사람만을 자신의 어미로 생각해서 죽도록 따라다니는 이것.

바로 기러기의 '각인'(imprinting)이라고 부르는 행동양식입니다.

그리고 저 앞에 할아버지는 이 새끼 기러기들에게 '어미'로 찍힌 사람이죠. 그가 바로 기러기의 '각인'을 최초로 연구한 콘라드 로렌츠, 이 책의 저자입니다.

다소 후줄근해 보이는 뒷모습으로 그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콘라드 로렌츠. 그는 일반생물학 교재나 동물행동학 교재의 뒤에서 색인을 찾아보면 반드시 있을 정도로 현대 생물학계에 큰 획을 그은 사람입니다. 동물의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비교행동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그는 1973년 이러한 업적들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죠. 어떤 사람들은 20세기에 큰 영향을 끼친 과학자들 가운데 그를 아인슈타인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기도 한다죠. 뭐, 이런 것들을 다 떠나서, 그의 연구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동물의 행동에 대해 아는 것은 크게 적었을 테고, 동물의 행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또한 없었겠죠.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콘라드 로렌츠의 수필집입니다. 책 제목인 '솔로몬의 반지'라는 것은 한 수필 제목이지요. 독일어 책의 원제를 우리 말로 풀면 '그는 짐승, 새, 물고기와 이야기했다'라고 하는데, 원제가 좀 더 책의 내용을 드러내주고 있는 듯 하네요. 다시 말해 이 책은 로렌츠가 동물들과 살아오면서 (연구를 했다기보다 정말 동물들과 살아왔다는 게 맞는 표현인 듯) 겪은 경험들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책은 '서문'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조금 옮겨볼까요?

'(전략) 내가 살아오면서 분노로 어떤 일을 행했다면 그것은 이 동물 이야기를 쓴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그것은 오늘날 모든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믿을 수 없을만큼 시원찮고 거짓된 수많은 동물 이야기에 대한 분노이고, 동물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자처하는 많은 글쟁이들에 대한 분노이다. 꿀벌의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게 하는 사람이나, 가물치가 서로 싸울 때 목덜미를 물게 하는 사람은, 자신의 관찰과 사랑에서 서술한다고 자처하는, 그 동물의 모습에 대해서 결코 순수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략)'

이 책이 처음으로 씌어진 1949년 독일에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정확하고 과학적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책들로 인해 그가 굉장히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무책임하게 쓰여진 동물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특히 동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오류를 가져다 줄 것인지 가히 짐작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죠.

잘 모르는 사람들이 책 팔아먹기 위해서 사육협회같은 데에서만 자료받아서 책을 써내고 나는 동물을 잘 아네, 사랑하네..라고 얘기해대며 로렌츠의 속을 벅벅 긁어놓았던 거죠. 빗대어 얘기하자면, 어디서 같잖은 비급 하나 들고 고수임을 자처하며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시정잡배들 때문에 자연을 벗삼아 은둔하며 내공을 갈무리 중이던 절대 고수가 노기탱천하여 '진정한 무의 경지를 보여주마.'라며 분연히 강호에 왕림...하셨다고나 할까요? ^^

그렇다고 이 책이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거나 시종일관 짜증이 섞여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시정잡배들에게 화가 나서 책을 쓸만큼, 분노는 사랑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정말로 순수하게 동물들을 사랑했고, 책에는 그런 그의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겨있습니다.

그럼에도 첫 장의 제목은 '동물에 대한 짜증'입니다. 온집안에 동물들을 '풀어놓고' 사는 그의 집에서 일어난 우울한 얘기들이죠. 길들인 쥐는 이불을 갉아먹고, 기러기의 배설물은 가구와 카펫에 묻어서 지워지지 않고, 기러기들은 정원의 장미를 뜯어먹기 일쑤고, 원숭이는 중요한 책들을 죄다 찢어놓고. 한마디로 읽다보면 난리도 아닙니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그런 난장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짜증과 손해를 보상해 주는 것이 학문적 성과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이어서 자신이 지금까지 관찰해온 동물들, 그리고 그 동물들과 겪었던 경험들을 담담하게 써내려갑니다. 진부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자연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상대를 아름다운 춤으로 유혹하는 싸움고기의 수컷이라던가, 자신들안에 위계서열이 뚜렷한 갈가마귀 사회, 자신을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던 기러기들, 충직한 눈으로 자신의 모든 걸 주인에게 내맡겼던 개 등등. 그와 함께 해온 동물들이 그의 글에서 다시 살아 숨쉽니다.

정말 '유려하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문장(번역도 꽤 좋은 편입니다.)이 그의 내공(!)과 맞물려, 글을 정신없이 읽게 끔 합니다. 흔히 동물 관찰기로는 '파브르 곤충기'와 '시튼 동물기'를 꼽는데, 콘라드 로렌츠의 이 책도 그 반열에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더불어 이 책에는 그가 글 내용에 맞는 삽화들을 그려놓곤 했는데, 이해도 잘 될 뿐더러 가끔은 그 그림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한 두가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왼쪽의 것은, 로렌츠와 살고 있는 기러기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웬만해선 쫓아내기 힘들다고 하는데, 정원의 장미를 뜯어먹는 기러기들을 쫓기 위해 로렌츠의 부인이 붉은 정원용 파라솔을 펼쳐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장면입니다. 기러기들도 저런 광경엔 놀라 도망간다고 하는군요. ^^ 오른쪽의 것은 기러기의 어미 노릇을 하는 로렌츠가 기러기 새끼들을 산책시키러 나갈 때의 일인데, 기러기 새끼들을 따라오게 하려면 기러기 정도로 몸을 낮추고 가끔가다 '꽥꽥'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하는군요. 그것에 한참 열중해서 덤불을 지나고 있는데 이상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보고 있더래요. 사람들의 위치에서 새끼 기러기들은 풀에 묻혀서 보이지 않고, 웬 나이먹은 콧수염난 아저씨가 오리 걸음을 걸으며 '꽥꽥'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거라죠. 허헛.;;

이 외에도 여러 그림이 있어서 책 읽는 데 또다른 맛을 준다죠.

책 크기도 작은 편이고 그리 두껍지도 않고(230여쪽) 비전공인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니만큼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콘라드 로렌츠의 동물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2007/03/03 15:42 2007/03/0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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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로를 닮아가는 상호각인 현상 - 정혜신의 그림 에세이 일백아홉번째 이야기 중에서

    Tracked from I Love You - 송인혁의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 2008/07/17 08:17 Delete

    푹푹 찌던 무더위가 드디어 장마비가 내리면서 한풀 꺾이는 모습이네요. 며칠동안 밤에 잠들기가 썩 편하지 않더니 어제는 무척 편하게 잠들었더랬습니다 ^^ 아... 다시금 홍콩 사람들을 비롯,

  1. # 2007/03/09 19:38 Delete Reply

    책 오빠꺼야? 나 빌려줘~

    1. Re: # HaraWish 2007/03/10 12:49 Delete

      어, 예전에 빌려 읽었던 책인데. 다시 도서관에서 빌려다줄까? 그런데 '누'가 뭐냐 '누'가..

  2. # 2007/03/15 16:36 Delete Reply

    '누이'라고 쓰는게 귀찮았어 -ㅅ-

    -다시 도서관에서 빌려줘 ;

    1. Re: # HaraWish 2007/03/17 16:54 Delete

      웅. 다음 주에 빌려줄께. 근데 요새 볼 시간이나 있겠냐?

  3. # 방랑자 2007/08/19 10:08 Delete Reply

    잘봣습니다.

  4. # 송인혁 2008/07/17 08:18 Delete Reply

    안녕하세요 하라님. 이 글 보고 당장 책 구입을 했습니다 ^^ 그냥 각인현상만 알았지 콘라트 교수의 그런 동물과 자연에 대한 사랑, 열정을 인식할 만한 계기가 없었던 것 같네요. 제 블로그에도 하라님 글을 인용했는데 괜찮지요? (트랙백 달아놨습니다) 감사합니다! ^^

    1. Re: # HaraWish 2008/07/23 15:01 Delete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재미있는 책이에요. 댓글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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